<재단 제28기 해외유학장학생 University of Pittsburgh 심리학과 박사, 현 University of Pittsburgh 연구원>
졸업한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 글을 적고 있노라니 재단 식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 하는 고민과 함께 밀려오는 건 그리움이다. 누구나 미국에 와서 처음 산 곳이 마음의 고향이듯 나에게도 미시간 대학교가 있는 앤아버는 늘 그리운 곳으로 남았다. 처음에 이 글을 부탁 받고서는 미시간 대학교와 앤아버를 소개하기 위해 학교의 역사와 규모를 비롯한 여러 정보를 일부러 모아두었었는데, 그보다는 내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오히려 이 글의 취지에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말 그대로 마치 일기를 쓰듯, 나의 유학 생활을 추억해보려 한다.

2003년 8월. 난생 처음 미국에 와서 도착한 앤아버는 대도시 생활에만 익숙했던 나에게 매우 낯선 곳이었다. 앤아버는 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데 차로 30분이 채 안 걸리고, 고층 건물은 다섯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규모의 대학 도시이다. 게다가 내가 앤아버에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되었었는데, 해가 질 무렵 공중 전화를 쓰기 위해 차도, 사람도 거의 없는, 가로등조차 정전으로 모두 꺼진 길을 혼자 걸으며 ‘여기선 정말 공부밖에 할 게 없겠구나’하고 생각한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 동북부 지역이 정전된 초유의 사태였지만).

과연 앤아버는 공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처음에 생각했듯 공부 외에는 할 것이 없는 심심한 시골 마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선 나의 학문적, 정신적 성장에 크게 영향을 준 것으로 다양성(diversity)의 가치를 표방하는 미시간 대학교의 분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서로 다른 생각, 가치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하며 서로의 배움과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믿음으로, 나 같은 외국 학생이 주눅 들지 않고 공부를 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심리학과 내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전혀 다름이 없었다. 임상 심리 전공의 특성상 매 학기 20학점에 가까운 수업을 듣고 인턴쉽과 티칭을 병행하면서도 무사히 유학 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특수한 경험과 시각을 나만의 장점으로 존중해준 지도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 그리고 함께 공부한 친구들의 공이 크다. 이런 환경에서 얻은 자신감은 박사 후 연구원을 하는 지금도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이런 마음가짐이 학문적 성장으로 이어진 것은 미시간 대학교 심리학과의 뛰어난 연구 환경 덕분이었다. 미시간 심리학과는 매년 소수의 학생을 선발하여 (임상 심리 전공의 경우, 내가 입학한 해의 신입생은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었다)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으로 미래의 학자를 육성한다. 미시간 심리학과는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규모(겸임교수까지 합치면 무려 150명에 달하는 교수진)만큼이나 연구 성과 또한 우수해서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연구하는 교수와 프로젝트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나 또한 입학 전에 이미 나의 연구 관심사와 맞는 지도교수를 정하고 1년 차 때부터 적극적으로 연구를 수행하였다. 내가 참여한 연구 프로젝트는 아동의 주의력 결핍, 공격성 등 문제 행동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인(아동의 기질, 부모 양육, 가정 환경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써 아동이 3살일 때 시작해서 내가 박사 과정에 입학했을 때에는 그 아동들이 6살이 된 시점이었다. 아동의 이상 (abnormal) 발달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이런 장기종단 (longitudinal) 연구가 필수이지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장기종단 프로젝트의 특성상 그 전까지는 이런 자료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자료 수집 및 변환, 자료 분석, 그리고 논문 준비에 이르기까지 연구 제반에 걸쳐 참여하였으며, 박사 논문에서는 아동이 10살일 때 모은 자료까지 분석할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더없이 귀한 연구 경험이 되었다. 현재 박사 후 연구원으로 있는 피츠버그 대학교에서는 무려 20년째 진행되고 있는 장기종단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데 미시간에서의 연구 경험이 큰 도움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대학 도시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도 많았다. 앤아버는 10만이 조금 넘는 인구의 3분의 1이 학생이고 3분의 1은 미시간 대학교에 근무하는 사람들이며 인구의 평균 연령이 20대인, 작지만 활기차고 젊은 도시이다. 앤아버 전체에 미시간 대학교 캠퍼스가 펼쳐져 있는 만큼 앤아버 어디를 가든 안전하고 마치 내 집에 있는 듯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도시임에도 문화와 예술의 수요가 많아 일 년 내내 공연과 전시회가 끊이지 않는데, 바쁜 학교 생활로 자주 가진 못했어도 가끔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특히 2006년 겨울에 찾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씨의 공연은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유학 생활을 하며 만난 소중한 인연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박사과정 6년 내내 변함 없이 나를 지도하고 격려해주신 Sheryl Olson교수님. 내 연구 주제인 아동의 문제행동 발달 분야의 권위자로서 나에게 학문적인 가르침도 많이 주셨지만 그 못지 않게 인간적으로 닮고 싶은 분이다. 바쁜 스케줄에도 지도 학생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사소한 자리에도 꼭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주시고, 유학 온 첫 해에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공부하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내 생일날 따뜻한 글을 적은 카드까지 주셔서 나를 감동시킨 선생님. 지금도 지도교수님과는 박사과정 시절에 시작했던 연구를 함께 계속 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학 생활에 있어 좋은 지도교수를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나는 큰 행운이 따랐다고 하겠다. 또한 심리학과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 그리고 매 학기 만나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던 재단 모임 장학생들 모두 나의 유학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무엇보다 유학 시절 얻은 가장 큰 인연은 현재 미시간 대학교 사회학과에 재학중인 황선재 장학생(제 29기 해외유학장학생)인데, 처음에는 서로 말이 잘 통하는 재단 친구로 만나 이제는 평생을 함께 하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본의 아니게 재단이 중매까지 서준 셈이다. 처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미시간 주의 작은 대학 도시 앤아버. 여기에서 나는 학문적 성취와 자신감은 물론 이렇듯 많은 소중한 인연들까지 얻었으니 어찌 늘 마음으로 그리지 않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