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제20기 해외유학장학생 Harvard U. 철학 박사, 현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나는 철학을 공부한다. 철학의 분야들은 주제에 따라 나누어지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나누어지기도 하고 인물에 따라 나누어지기도 한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언어철학, 그리고 심리철학을 주로 공부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이 세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설명하려면, 먼저 내가 철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철학은 근본학이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들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령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개별 과학에서는 일단 인과 관계라는 것이 있다고 가정하고, 세계의 현상들이 맺고 있는 다양한 인과 관계들을 드러내는 법칙들을 밝히고자 한다. 그러나 개별 과학에서는 인과 관계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한다면 그 본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탐구는 철학의 몫이다. 과학자가 이와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는 철학적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다루는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 문제들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답을 발견할 수 있는지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 문제들에 대해 과연 답을 발견할 수 있는지조차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기묘한 상황은, 도대체 철학적 문제들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길래 그 답을 찾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가라는 물음을 낳는다. 그리고 이는 궁극적으로 “과연 철학이란 학문의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 물음들을 탐구하는 것 또한 철학의 몫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스스로의 정체성마저도 탐구한다. 철학은 자기 자신마저도 문제 삼는다.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합의된 답이 없으므로, 우리는 어느 철학자의 생각이 올바른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철학자가 더 뛰어난지는 알 수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통찰력 있는 생각을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전개한 철학자들이 있다. 이들을 우리는 위대한 철학자로 분류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흄, 칸트 등이 바로 그러한 이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표적 저서들을 우리는 철학의 고전들로 분류한다.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합의된 답이 없으므로, 철학의 고전들은 가령 자연과학에서의 고전들과 다른 의의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물리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뉴튼의 『프린키피아』를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읽어야 할 것은 Fundamentals of Physics같은 교과서와 저널의 논문들이다. 뉴튼이 어떤 생각을 거쳐 뉴튼 역학을 발견하게 되었든, 물리학을 연구하기 위해 보다 중요한 것은 뉴튼이 발견한 역학의 법칙들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고전들을 읽어야 한다. 철학적 문제들이 합의된 답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답 자체가 아니라 도대체 그들이 어떤 생각을 거쳐 그 답에 이르게 되었는가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고전들은 가장 뛰어난 철학적 생각의 전개 과정을 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단순히 지나간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의 철학적 논의에도 빛을 던져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이 가령 플라톤의 철학을 연구하는 이유는 지성사(知性史)적인 문제의식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그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플라톤은 어떤 생각을 전개하였는지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해당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아예 플라톤의 철학을 연구하는 것 자체를 평생의 전공으로 삼기도 한다.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이 자신의 일생을 걸고 연구할 만큼 가치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가 특히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철학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주로 영국에서 활약한 20세기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다. 나는 그의 철학적 견해가 올바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이고, 우리가 아직 근본적인 면에서 그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21세기의 철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든 그의 철학과의 전면적 대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다.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철학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기존의 어느 철학자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창적 견해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들이 답을 제시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아니라 모든 철학적 명제들이 무의미하고 따라서 철학적 문제들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적 명제들이 무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언어가 우리를 미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임무는 바로 우리 언어 사용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통해 철학적 명제들의 무의미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모든 철학은 바로 언어 비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논리-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철학과 『철학적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철학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전기철학과 후기철학 모두에서 그는 방금 언급한 독창적인 철학관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철학적 명제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무의미하며, 이들의 무의미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기철학과 후기철학에서 각각 다른 생각을 발전시켰다. 나는 박사논문에서 비트겐슈타인 전기철학의 발전 과정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전기철학에 대해 학계의 기존 해석들과 다른 대안적 해석을 제안하였다 (Kang 2005b). 특히 나는 전기철학의 핵심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른바 언어에 대한 ‘그림이론’이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일종의 추론적 의미론을 제시하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또한 『논리-철학 논고』를 이루고 있는 명제들은 철학적 명제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와 일관되게 모두 무의미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논고』에서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그 명제들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논리적 표기법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동안 나는 이러한 나의 연구 결과를 발전시킨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Kang 2005a, Kang 2006, 강진호 2007, 강진호 2009a, 강진호 2009c). 현재는 한국학술협의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올 연말까지 박사논문을 수정 보완한 단행본을 펴내는 것을 목표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강진호 2010b). 앞으로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에 대한 나의 해석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키면서, 이를 토대로 그의 후기철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나의 연구는 자연히 언어철학의 연구로 이어졌다. 철학적 진술들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그의 견해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본성, 특히 언어적 의미의 본성이 무엇이며 의미와 무의미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를 구할 곳은 언어철학이 아니라 언어학, 그 중에서도 의미론 분야가 아닐까? 박사 과정에서 언어철학과 언어학을 모두 공부하면서,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물론 70년대 중반에 의미론이 언어학의 본격적인 한 분야로 확립된 이래 오늘날까지 비약적인 발전이 있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 과학과 달리 의미론 분야는 아직 전문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이론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 몬태규 의미론을 대표로 하는 모형이론적 지칭의미론이 지배적 이론 틀로 자리잡고 있지만, 지칭의미론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론 틀이라는 비판들 또한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나는 통사론 분야에서 생성문법의 이론 틀을 확립하였고 현대 언어학을 실질적으로 창안했다고 볼 수 있는 촘스키(Chomsky)의 저서들을 공부하면서, 뜻밖에도 그가 지칭의미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흥미롭게도 촘스키의 비판이 지칭 개념을 통해 의미 개념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최근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Kang 2009b, 강진호 2010a). 앞으로도 관련 연구를 계속 진행해나갈 계획이며, 궁극적으로는 수리논리학의 모형이론이 과연 자연언어 의미론을 발전시키는데 얼마나 적합한 도구인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언어철학을 연구하면서 심리철학에 대해서도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언어와 마음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첫 번째로, 많은 심리 상태들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예를 들고 있는 것처럼, 개는 성내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기뻐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희망할 수는 없다. 또한 개는 자기 주인이 문간에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기 주인이 내일 모레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 오직 인간처럼 ‘희망’과 ‘내일 모레’라는 언어 표현의 의미를 숙달할 수 있는 생명체만이 비로소 그런 심리 상태들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언어 표현과 심리 상태는 모두 세계에 있는 존재자를 표상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가령 ‘Kant’라는 독일어 표현은 그 자체로는 한낱 소리나 잉크 자국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실제 세계에 생존했던 철학자 칸트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가령 칸트가 독일의 철학자라는 나의 믿음은 통상적인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두뇌 속의 어떤 신경생리적 상태에 지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두뇌 밖의 존재자들인 칸트나 독일을 표상한다. 철학자들은 언어 표현과 심리 상태의 이러한 표상적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부르는데, 언어 의미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은 지향성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세 번째로, 인간의 언어 사용 행위는 자유롭고 합리적인 인간 행동의 한 범주이다. 지구의 자전이나 금속의 산화, 심장의 박동과 같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운동과 달리 자유롭고 합리적인 인간 행동은 믿음과 욕구 등의 심리 상태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 사용 행위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은 심리 상태에 기반한 자유롭고 합리적인 행동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심리 상태의 지향성이나 인간 행동의 합리성에 대한 이해를 구할 곳 역시 심리철학이 아니라 심리학이 아닐까? 언어학에 비해 심리학에 대한 나의 공부는 아직 일천하지만, 심리학 또한 언어학과 마찬가지로 아직 전문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이론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비교적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론 틀 뿐 아니라 방법론에 대한 합의도 없으며, 심리학의 세부 분야와 연구 주제에 따라 자연과학적,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방법들이 다양하게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촘스키는 언어와 마음의 본성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특히 자유의지 개념은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아마도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며, 따라서 자유의지에 기반한 인간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행동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 또한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과학자들 중에는 자유의지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대담한 주장을 펴는 이들도 있지만, 촘스키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해당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문 영역을 넘어서 펼치는 철학적 주장으로 실제로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 비트겐슈타인 또한 촘스키의 이런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자유의지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과학자야말로 ‘자유의지’라는 개념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한 철학적 환상에 빠져 무의미한 철학적 명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과 촘스키의 생각에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있으며, 앞으로 언어 사용 행위를 포함한 인간의 자유롭고 합리적 행동을 과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왜 성공할 수 없는지, 그리고 그렇다면 이런 행동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시켜 나가려고 한다.
자유의지의 본성과 같은 철학적 문제들이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들이므로, 철학자들 뿐 아니라 누구나 이 문제들에 대해 비록 가끔씩이라도 생각해보고 고민할 것이다.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수단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을 대치할 수 있는 과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이런 주장을 책임감 있게 옹호하려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언어와 마음의 본성을 과학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개별 학문들을 꾸준히 공부하여 그 성과를 흡수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자들의 어떤 주장이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있으며 어떤 주장이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결국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철학의 고전들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관련된 개별 학문들에 대한 연구가 모두 필요하다. 이러한 두 영역의 연구를 토대로 할 때에만 비로소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의미 있는 탐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실제로 자주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러나 철학이 정말로 근본학이라면 당연히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또한 매혹적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