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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선생님
학자 : 조성우
작성일 : 10.03.15


<재단 제25기 해외유학장학생 U. of Cambridge 사학 박사, 현 Cambridge U. 연구원>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같은 대학에 연구원으로 신분을 바꾸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유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어딘지 어색하다. 그럼에도 굳이 학생으로 공부하던 시기를 돌이켜 보자면 지도교수였던 데이빗 맥멀린(David L. McMullen) 선생님, 그리고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던 데니스 트위쳇(Denis C. Twitchett) 선생님, 두 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2002년 초여름, 나는 런던대학 동양학-아프리카학 학원에서 팀 바렛(Tim Barrett) 선생님 지도로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해 가을부터 데이빗 맥멀린 선생님 지도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당대사(唐代史)를 공부하게 되어 있었던 까닭에, 논문을 쓰는 한편으로 박사 과정 생활에 대한 기대와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논문 내용으로 상의할 일이 있어 연구실로 찾아 갔을 때, 논문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자 선생님은 느닷없이 언제 한 번 기회를 보아 함께 데니스 트위쳇 선생님을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저명한 중국 중세사 연구자이자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트위쳇 선생님의 이름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연로하신 분인데다가 당시 어디에 계신지 몰랐기 때문에 나에게는 약간 뜻밖의 이야기였다.

9월 초에 석사 논문을 제출하고 케임브리지에 이사한 후 한 동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도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특유의 칼리지 시스템 탓도 컸다. 입학하여 학기가 시작되자 학과와 도서관에서 열리는 여러 종류의 설명회와 친목 모임에 더해, 늘 정장에 치렁치렁한 가운을 입어야 하는 칼리지 행사들 때문에 더 바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런던과는 여러 가지로 다른 점이 많았지만 가장 강하게 느꼈던 차이는 말투와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였다. 학교 건물 안의 바에서는 불쾌한 냄새가 진동하고 (일설에는 마리화나 냄새라고 한다) 학생들이 교수진을 허물없이 대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런던 대학과 달리 800여 년이라는 오래된 역사 때문인지 케임브리지 대학 곳곳에는 까다로운 규정과 위계질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맥멀린 선생님과 같은 칼리지 소속이었던 덕분에, 칼리지 생활에 대해서도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영국의 많은 대학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 학위과정 프로그램에는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규 교과목이 없었다. 대신, 동료 대학원생들과 매주 한 번씩 지도교수인 맥멀린 선생님의 연구실에 모여 사료를 읽는 세미나에 참석해야 했고, 정기적으로 선생님과 독대하여 연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조언을 듣게 되어 있었다. 런던에서 공부하는 동안은 그다지 경험할 일이 없었던 사료 강독 세미나에 적응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세미나는 보통 4-5명의 참석자가 돌아가면서 텍스트를 하나씩 맡아서 읽고 번역하고 해설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텍스트에 포함된 어휘들의 문학적, 사상적, 역사적 전거를 찾고 내용 중에 등장하는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문헌자료의 내용을 교차대조하는 작업은 한국에서도 일상적으로 하던 일이라 큰 무리가 없었다. 가장 신경이 쓰하고 것 중 하나는 유려한 한문 문장의 어감을 살리면서 정확하게 의미가 전달되도록 영어로 옮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크게 불편을 느꼈던 이 걸한문 문장들을 한국어 발음으로 읽던 습관을 버에 포늘 중국어 발음으로 읽어야 하는 일이었다. 학부생들의 자치통감 세미나를 맡고 있는 지금도 한문 문장을 접하 읽나도 모쁴적,머릿속에서 교차대한국어발음으로 읽고 있을 정도이니 당시에 적응이 되지 않았던 이 걸두말할 필요도 없다. 학생들이 놓친 전거의 원문을 선생님이 구두로 암송해서 알려주는 경우에는 원문이 머릿속에 바로 조하르지 않아 당황하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일을 몇 번 겪으면서 맥멀린 선생님이 상당한 분량의 중국 고전 텍스트를 암은 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생님의 깊셀자가술과 엄정한 연구자세에 자극받 깊셀자가술과입학 첫 학기부터 연구계획서를 써야 하는 부담감과 서투른 번역 작업으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을 때 선생님은 늘 격려로 일관하셨다. 학생의 사소한 성과에는 큰 칭찬을, 기대에 못미치는 성과에는 오히려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선생님 덕분에 재가 어설프게나마 학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사과정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데이빗 맥멀린 선생님과 칼리지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선생님은 데니스 트위쳇 선생님이 나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트위쳇 선생님은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퇴임하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계시던 중 중풍으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하시다고 들었던 터라 나는 트위쳇 선생님 건강 상태가 허락할 때면 언제든 좋다고 대답했다. 그 후로 박사과정 1년차가 끝나면서 제출하게 되어있는 연구계획과 참고문헌목록을 작성하느라 바빠서 트위쳇 선생님 일은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리고 2004년 1월 쯤, 지도교수는 아니지만 평소 여러 가지 도움을 주던 조셉 맥더못(Joseph P. McDermott) 선생이 연구실로 불러 내 근황을 묻다가 다소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케임브리지에 중국어, 일본어로 된 책과 漢籍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책 목록 작성을 도와줄 대학원생을 찾고 있으니 가끔 시간을 내어 도와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큰 도시도 아니고 케임브리지 같은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그런 장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결국 학과의 은퇴한 연구자 정도이겠으니, 사실은 뻔한 이야기였다. 맥더못 선생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계속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어서, 대뜸 그 장서가가 트위쳇 선생님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2004년 2월 어느 날 오후, 맥더못 선생과 함께 트위쳇 선생님 댁을 처음 방문했다. 케임브리지는 워낙 작은 도시라 내가 살던 곳에서 트위쳇 선생님 댁까지는 자전거로 10분, 걸어서 30분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다. 대문을 열어 맥더못 선생과 나를 맞아 주신 트위쳇 선생님은 불편한 보행 때문에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 것을 제외하면 정정해 보이셨다. 처음 바렛 선생님이나 맥멀린 선생님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만나게 된 셈이었다.

거실에서 내 연구 주제나 한국의 중국사 연구 동향, 케임브리지의 분위기 등에 관해 한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트위쳇 선생님은 자신의 2층의 서재를 보여주셨다. 평소 관에 사용되는 방 뿐 아니라 다른 2개의 방을 더해 작지 않은 방 3개가 전부 서재였다. 침실을 제외한 2층 전체를 가득 채운 이 장서의 목록을 만들기 위해 예전에도 몇 번 사람을 구해 부탁한 적이 있었으나 영어, 중국어, 일본어 장서 모두에 대해 로마자화한 목록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좀처럼 찾을 수 없어서 그 때까지 체계적으로 작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았다.

이후 일주일에 한 번, 세 시간씩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장서 목록을 만들게 되었지만, 사실은 세 시간 중 한 시간 정도는 내 연구계획서나 에세이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중국사의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선생님의 견해를 듣곤 하였다. 만날 때마다 혹시 지난 한 주 동안 에세이 새로 쓴 것 없냐고 묻거나 맥멀린 선생님과 어떤 공부를 했는지 이야기해 보자는 선생님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때도 있었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부지런히 글로 써내지 않으면 연구자로서 실격이라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인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매주 에세이를 써서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가끔은 빈손으로 가서 공부에 관해 궁금한 것을 솔직하게 여쭈어 보기도 하였고, 선생님의 학생 시절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선생님이 일본의 중국법제사 연구자로 유명한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 문하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이야기, 선생님이 한문을 배웠던 모울(A. C. Moule)이나 선생님 세대의 중국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장서 목록을 만드는 동안, 선생님의 장서는 물론, 선생님의 손을 탔던 원고들을 직접 들추어 볼 기회도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 하나는 서재 한 구석의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던 빼곡한 지도들이다. 선생님은 원래 학부시절 지리학을 전공하셨던 까닭인지도 모르겠지만 본인의 연구논문이나 저서에 사용되는 지도나 도표 등을 손수 꼼꼼하게 그리셨고, 그 지도의 원본들을 잘 모아서 보관하고 계셨다. 케임브리지 중국사 원고에 쓰기 위해 그렸던 지도의 원본들도 보관되어 있었다.

2004년 2월에 시작하여 약 1년 동안 매주 작업을 하면 목록이 완성되지 않을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선생님 댁을 방문하는 일은 2005년 12월까지도 계속되었다. 매주 정해진 요일에 지도교수인 맥멀린 선생님의 강독 세미나에 참석하고 개별적으로 연구 진행상태를 보고하는 한편, 같은 주의 다른 날에는 트위쳇 선생님께 역시 비슷한 보고를 되풀이하는 상황이 2년 가까이 지속된 것이다. 목록을 만드는 데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된 것은 중간중간 선생님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몇 주간 작업을 중지하기도 한 탓도 있고 매번 선생님과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쓴 탓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2005년 12월 말에 선생님은 심장마비로 쓰려지셨고 잠시 회복하시는 듯하다 이듬해 2월 말 결국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맥멀린 선생님과 함께 케임브리지 외곽의 아주 작은 교회에서 조촐하게 치러진 트위쳇 선생님의 장례식에 다녀오고 나서 한동안 마음 한 구석이 몹시 허했다. 2년 동안 당연하게 일상의 일부처럼 선생님을 만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고, 그 시간 동안 선생님을 추억할 사진 한 장 찍어 놓지 않았던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9월에 맥멀린 선생님이 정년퇴임하면서 나는 공식적으로 지도교수가 없는 학생이 되었다. 한 동안 두 분의 선생님과 공부하던 것 같은 상황에서 혼자 남은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비공식적으로 계속 맥멀린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학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학위수여식 당일, 이미 정년퇴직하신 맥멀린 선생님은 제자의 학위 수여를 축하해 주기 위해 일부러 식장까지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제 서로 동등한 박사 학위 소지자가 되었으니 자신을 편하게 대하라고 농담을 건네는 한편,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서 찾아오신 부모님께 반갑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 새삼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선생님들과의 인연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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